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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관리자 | 2012.05.18 13:02 | 조회 4014

 

◈안압지(임해전지)◈


안압지는 신라천년의 궁궐인 반월성에서 동북쪽으로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다.
통일 시기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 많은 부를 축적한 왕권은 극히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누리면서 크고 화려한 궁전을 갖추는데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통일 직후 674년에 안압지를 만들었으며 679년에는 화려한 궁궐을 중수하고 여러 개의 대문이 있는 규모가 큰 동궁을 새로 건설하였다.
안압지와 주변의 건축지들은 당시 궁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새 동궁, 곧 임해전의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다만 건물터의 초석만 발굴되었다.


임해전과 안압지에 대한기록(삼국사기)을 살펴보면 궁내에 못을 팠다는 기록이 문무왕 14년(674)과 경덕왕 19년(760)에 두 번 나타나며, 임해전에서 군신에게 연을 베풀었다는기록이 효소왕6년(697)과 혜공왕 5년(769)에 있다.


소성왕 2년(800)에는 임해문과 인화문이 파손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상을 정리해본다면 약 백 년 간격을 두고 궁내에 못을 팠다는 것은 처음 판 못을 보수나 확장한 것으로 해석되고, 임해전은 그 못 가까이 에 지어진 동궁이라 볼 수 있다.

또 임해문과 인화문이라는 것도 임해전을 중심으로 한 연못정원의 담에 있던 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 적어도 현재의 안압지가 조성된 연대는 문무왕 무렵 내지 그 이전으로 생각할 수 있을 터이다.

다만 「삼국사기」에 연못의 이름을 적지 않고 궁 안의 못이라고만 기록한 것은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되자 이곳이 궁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고, 건물의 보수가 이루어지지 못해 폐허가 되어 이름을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안압지의 원명이 '월지'(月池)이고 동궁은 월지궁으로 불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안압지가 반월성 가까이 에 있고 또 동궁의 위치가 연못 속에 비치는 아롱거리는 달을 감상하기 알맞다는 심증적 이유 때문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안압지라는 현재의 이름은 거의 본래의 모습을 잃은 못 가에 무성한 갈대와 부평초 사이를 오리와 기러기들이 날아다니자 조선의 묵객들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못은 동서 길이 약 190m, 남북길이가 약l90m의 장방형 평면이며, 면적은 1만5,658평방미터(4,738평), 세 섬을 포함한 호 안 석축의 길이는 1,285m이다.

못 가의 호 안은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은 절묘한 굴곡으로 만들고, 서쪽과 남쪽에는 건물을 배치하고 직선으로 만들었다.
서쪽 호 안은 몇 번 직각으로 꺾기도 하고 못 속으로 돌출 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못 가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연못이 한없이 길게 이어진 듯 여겨진다.

못 속에는 섬이 세 곳 있는데, 세 섬의 크기가 각기 다르고 윤곽선 처리가 자연스럽다. 발해만의 동쪽에 있다고 하는 삼신도(방장도, 봉래도, 영주도)를 본딴 듯하다. 동쪽과 북쪽의 호 안에는 무산 12봉을 상징하는 언덕들을 잇달아 만들어 놓았다.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3m에서 6m 정도이며 선녀들이 사는 선경을 상징한다. 「삼국사기」 문무왕 14년조를 보면 "궁 안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 고 기록되어 있다.

동, 북, 남쪽 호 안의 높이는 2.1m 정도이고 궁전이 있는 서쪽 호 안은 5.4m로 좀더 높다. 이는 못 가의 누각에 앉아 원(苑)을 내려다볼 수 있게 배려한 높이이다. 못 바닥에는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옮겨다 깔았는데, 못 가운데에 우물 모양의 목조물을 만들어 그 속에 심은 연뿌리가 연못 전체로 퍼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연꽃이 못에 가득하면 답답하고 좁게 보일 것을 미리 방지한 지혜이다.

못물의 깊이는 약 1.8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압지의 시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입수부와 배수부이다. 입수부는 물을 끌어들이는 장치를 한 곳으로 못의 동남쪽 귀퉁이에 있으며 정원 못에 연결되어 있다.

동남쪽의 계류나 북천에서 끌어온 물을 거북이를 음각한 것 같은 아래위 두개의 수조에 고이게 하였다가, 자연석 계단으로 흘러 폭포로 떨어져 연못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아래위 수조는 약 20cm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넘친 물이 지표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넓적한 저수조를 만들었다 위 수조에는 용머리 토수구를 설치하여 용의 입으로 물을 토해서 아래 수조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 용머리는 없어지고 지금은 용머리를 끼운 자리만 남아 있다.

아래 수조에서 연못으로 떨어지는 폭포의 높이는 약 1.2m 정도이다. 또한 물이 입수부의 완충 수조를 지나 못으로 수직 낙하하는 지점에는 판판한 돌을 깔아놓았는데, 이는 못 바닥의 침식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물을 끌어들이는 데도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입수부를 통해 들어온 물은 연못 안의 곳곳을 돌아 동북쪽으로 나 있는 출수구로 흘러나가는데, 출수구에서는 나무로 된 마개로 부위를 조절했음을 알 수 있다.

안압지는 바라보는 기능으로 만들어진 궁원이다. 지척에 있는 무산 12봉이 아득하게 보이도록 협곡을 만들고, 삼신도와 무산 12봉 등 선경을 축소하여 피안의 세계처럼 만들었다. 지금도 외곽에 높은 담을 설치하여 경역을 아늑하게 만들고 갖가지 화초들과 새와 짐승들을 기르면 별천지 같은 깊은 원지의 생생함이 살아날 터이다.

연못 서쪽과 남쪽의 건물터 등을 조사한 결과 건물터 26동, 담장터 8곳, 배수로시설 2곳, 입수부 시설 1곳 등이 밝혀졌다. 1980년에는 연못 서쪽 호 안에 접하여 세워졌던 5개의 건물터 중에서 3개를 복원시켰으며,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초석을 복원하여 노출 시켰다.

유물은 와전류를 포함하여 3만여 점이 나왔다.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군신들이 이곳에서 향연 할 때 못 안으로 빠진 것과 935년 신라가 멸망하여 동궁이 폐허가 된 뒤 홍수 등 천재로 인하여 이 못 안으로 쓸려 들어간 것, 그리고 신라가 망하자 고려군이 동궁을 의도적으로 파괴하여 못 안으로 물건들을 쓸어 넣어 버린 것 등으로 추정된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 서쪽에 있는 안압지 관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 궁중에서 사용했던 생활용기들을 비롯하여 나무배 등 700여 점의 대표유물이 전시되고 있는데, 단일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로 전시관 하나를 다 채운 것도 보기 드문 일이다. 안압지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부장품 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신라무덤의 출토품과는 달리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것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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